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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용서


강사 : 송봉모(예수회 신부,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일자 : 2013년 5월 27일



■ 들어가는 글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 폴 마이어 



그런데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옛말에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한은 바위에 새기고 은혜는 냇물에 새긴다. 


왜 용서하기가 어려운가?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분명 잘못했는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질문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 들기 때문이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상대의 잘못된 행위를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용서할 수가 없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를 용서하면 상대는 얼씨구나 하며 아무 죄의식 없이 살아갈 것이니, 공연히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 같아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 나에게 상처 준 상대를 용서해주면 내게 벌어진 비극을 되돌릴   길이 없다.



위에 언급한 이유들을 다 제치고라도 내 자존심이 용서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용서해주면 내 자존심이 회복될 길이 없다고 보기에.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분한 마음에 쉽지 않은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 못한다는 것은 마음이 옹졸해졌다는 것이다. 마음이 옹졸해진 것은 옹졸해지고 싶어서 옹졸해진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으면서 오그라진 탓이다. 


우리가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한때 얼마나 우리와   다정한 사이였던가!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 산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상처를 주었다 해도 별로 개의치 않고 금방 잊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잘 아는 사람 친밀한 사람이 준 상처는 쉽게 잊을 수가 없다. 한때 다정했던 사람, 신뢰했던 사람이 상처를 주었기에 이제는 바늘조차 꽂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굳어지고 오그라든 것이다. 이렇게 상처는 친밀함을 먹고 산다. 



■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

  

(1)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화가 나서 다음처럼 외친다. 

“그 사람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 사람이 저지른 일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인간쓰레기라고요.” 

이렇게 소리 지를 때, 우리 마음 안에는 화, 분노, 쓰라림, 적개심, 복수심, 모멸감, 우울함, 무가치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쌓이게 된다. 이러한 감정들이 우리 안에 가득 차게 되면 무엇보다도 우리 몸이 견디지를 못한다. 열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아프고, 소화가 안 되고, 잠을 이를 수 없고, 안절부절못하고. . . . 가슴에 가득 차 있는 화, 치를 떨게 만드는 분노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망가트리는 독소다. 이러한 독소가 우리 안에 스며들 때 우리에게는 내적 자유도 평화도 그리고 은혜에 가득 찬 삶도 없다. 


이런 식으로 얘기해보자. 우리가 독사에게 물렸을 때,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독사에게 물린 자리가 아니다. 독사가 우리 몸에 남긴 독이다. 독이 우리 몸에 서서히 스며들면서 우리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남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서 남긴 것 곧 분노, 화, 적개심, 복수심이 독이다. 이러한 독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우리 안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데  어찌 우리 몸이 견딜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 중 4.2%가 화병에 걸려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화병이란 무엇인가? 단어를 분석해보면 속에서 불이 나는 병이다. 정신의학에서 얘기하는바, 화병은 화날 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가슴에 화가 부글부글 끓고 신체에 이상이 생기는 병이다. 남대문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고, 항상 화가 가슴 안에 있기에 엉뚱한 곳에다 화를 풀어버리는 병이다. 설거지 하다말고 갑자기 그릇을 내 던진다거나, 프라인 팬을 '꽝'하고 내려친다던가, 애꿎은 강아지를 발길로 찬다든가,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사건을 머리에 떠올린 순간 화가 나서 욕을 해대는 것 등이다. 


어떤 분들은 가볍게 들을지 모르지만, 정말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면 용서하여야 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화를 적게 내는 사람에 비해 심장질환에 걸릴 확률이 세 배나 높다. 일단 화를 내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방출되고, 이 호르몬은 관상동맥에서 말초혈관까지 이르는 모든 혈관을 좁힘으로써 심장에 무리를 주고, 그 결과 심장병이나 심장마비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같은 연구조사에 의하면, 아무리 정신없이 쫒기는 살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분노의 감정에 시달리면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강하지 않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우리 삶의 필연적인 스트레스이기에 ‘일반 스트레스’로 분류하지만, 화로 인해 생겨난 스트레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에 ‘나쁜 스트레스’로 분류한다. 내가 상처받은 것 도 억울한데 화병에 걸려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암에 걸리고, 그래서 일찍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설령 화병에 걸려 일찍 죽지 않는다 해도, 원망과 적개심의 포로가 되어서 귀중한 생을 허비하고 있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짧고 소중한 생을 충만히 살지 못하고 넋두리만 늘어놓으며 허망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더 억울한 것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기억조차 못한다는 점이다.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른 체 잘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금까지 15,000여명의 말기 암환자를 치료한 암전문의 의사가 있다. 많은 환자들이 몇 달 살지 못할 것이란 진단을 받은 상태에서 소문을 듣고 이 의사를 찾아온다. 그리고는 찾아온 환자들 가운데 54퍼센트가 5년 이상을 살고, 10년이나 15년 이상을 산 환자들도 적지 않다. 이 의사는 말기암환자들과 첫 대화를 할 때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용서하셨습니까?” 


그러면 환자들은 십중팔구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아니 제가 암에 걸린 것과 용서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묻는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전인격적인 치료를 실시합니다. 인간은 육체와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속인 친구를 용서하셨습니까? 배우자를 용서하셨습니까? 자녀들을 용서하셨습니까? 부모님을 용서하셨습니까?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용서하셔야 합니다. 상속문제로 형제들과 싸웠습니까? 그들을 용서하셨나요? 과거에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용서하셨나요?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저런 일들을 용서했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용서하지 않는다면 저를 만나로 오지 마십시오.” 


환자들은 이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도 용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여러 사람들은 향한 강한 원망과 미움이 있음을 보게 된다. 다음 번 만남에서 의사 선생님은 환자가 용서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면 환자에게 이렇게 들려준다.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파괴할 뿐입니다. 우리 안에는 증오심, 분노, 복수심이 가득하죠.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있습니다. 그 문에는 큰 표지판이 달려있지요. ‘용서하시오’란 글귀가 적혀 있는 표지판이 달려진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세요. 그러면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무거웠던 짐이 어깨에서 풀려나갈 것입니다.”



원망은 황산과 같아서

그것이 담긴 그릇조차 녹인다.


- 작자 미상



(2)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기 위해서 용서는 필요하다.


용서를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주위 사람들 특별히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이다.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은 늘 불평불만에 차 있는 사람들이다. 부정적 감정이나 생각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은 없다. 한 사람의 마음이 우울하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어두워진다. 늘 화를 내는 사람 옆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화를 먹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울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는 늘 우울하다. 


만일 우리가 불행했던 지난날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이웃을 탓하고, 가족을 원망하고, 늘상 분노에 차서 살아가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처음에는 우리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려주고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사람들마저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점 우리를 멀리할 것이다. 우리에게 계속해서 지지와 격려를 주기에는 그들 자신이 너무나 지치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려 하고 그렇지 않은 에너지는 멀리하고픈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홀로 남겨진 우리는 배반감에 몸부림치게 되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상처는 아물기커녕 더 심해질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원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게 얼마나 미련스러운 짓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먹으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그의 얼굴은 붉게 충혈 되어 있고,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그 사람 옆에는 매운 고추가 수북이 쌓여 있다. 고추를 입에 넣고 씹을 때마다 그는 더욱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고추 하나를 입에 넣는다. 누군가가 마침내 물었다. “왜 계속해서 고추를 먹지요? 여러 개 먹었으면 고추가 얼마나 매운지 잘 알 터인데?” 그 남자가 내뱉듯이 말하였다. “혹시 단맛이 나는 고추가 있을지도 모르잖소.” 이 사람은 단맛이 나는 고추를 행여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서 자기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매운 고추를 계속 먹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미련스런 사람인가? 우리가 스스로 상처를 움켜쥐고 원한 속에 사로잡혀서 고통을 자초하면서 살아갈 때의 모습이 바로 위의 고추를 먹으며 고통을 계속 자초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각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과거에 상처 받았던 일을 계속 떠올리면서 여전히 피해를 입는 것이야말로 두 배로 억울한 일임을 깨닫는 자각이 필요하다. 


심리학에서는 ‘적대자와의 동일시 원리’란 말을 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가 집중하는 것에 따라 자기 모습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누군가를 밤낮으로 미워한다면 어느새 그 사람의 모습을 닮게 된다는 것이다.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어머니로부터 학대받은 며느리는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내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절대로 우리 시어머니처럼 되지 말아야지.” 하지만 훗날 시어머니가 되고 나면 옛날의 시어머니와 똑같이 행동하거나 아님 더 악랄하게 행동한다. "회초리로 매 맞은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몽둥이로 며느리를 때린다"는 속담이 있듯이 더 잔인한   시어머니가 되어 있다. 이처럼 미움은 강렬한 영향력을 갖는다. 악에다 초점을 맞추면 그만큼 악순환의 고리는 끊기 어렵다.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악을 선으로 갚는 일은 하느님다운 일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일은 인간다운 일이다. 선을 악으로 갚는 일은 악마다운 일이요,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다운 일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을  짐승에다 비유한 것은, 짐승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누가 나에게 피해를 주었으면 나도 그에게 피해를 주는 것,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응답하는 것은 짐승적인 복수 욕구를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슬로건을 갖고서 인생을 산다면 머지않아 세상 사람들은 모두 눈이 멀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가 복수를 통해 가해자가 되면서 복수의 악순환은 영원히 종료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류 역사는 복수가 지배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복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 몸 안의 독소들이 우리 몸을 망가뜨린다고 해도, 어떤 이들은 여전히 용서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복수는 나의 것’이란 영화 제목을 자신의 것인 양 취급하면서 복수하려고 한다.  


어쩜 그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용서보다 복수가 더 달콤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복수는 비록 순간적이지만 카타르시스를 준다. 문제는 이 카타르시스가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귀한 관계는 물론이요 때로는 애꿎은 사람들의 삶까지도 다 망가뜨리는 독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속담은 복수에 관한 현명한 지시를 담고 있다. “당신이 잔인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다면 무덤을 두 개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하나는 원수의 무덤이요, 다른 하나는 네 자신의 것이다.” 


만델라(Nelson Mandela)는 백인 정권의 핍박을 받아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다음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다. 27년이란 수감생활은 미움과 원한이 사무칠만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하해주러 온 내빈들을 소개하던 중 전 세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처음 소개된 내빈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정계 요인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소개된 사람들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지켰던 세 명의 간수들이었다. 


만델라가 외친 메시지는 보복이 아닌 용서였다. 징벌이 아닌 화해였다. 다음 말은 그가 27년 만에 감옥에서 나오면서 가졌던 심정이다.


“내가 감옥소에서 나와 바깥세상 자유로 통하는 대문을 넘어설 때, 분노와 원한을 감옥소 뒤에 남겨두지 않는다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었기에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서 “이 나라에 복수, 앙갚음, 보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인종 차별주의가 없는 남아공을 건설해야 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었다. 



용서는 겁쟁이나 하는 짓이란 소리를 자주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용서를 해보기나 했을까?

용서는 힘든 일이다.

끝임 없는 자기 수양, 본능의 억제, 말조심 

그리고 이 시대의 천박한 정신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 마리에타 재거




■ 구체적으로 용서하기 위하여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내가 진정 바라는 삶은 이렇게 끝없이 화를 내면서 신세타령만 되풀이하는 삶인가? 아니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삶인가?” 만약 두 번째가 나의 대답이라면 다음에 서술된 구체적 용서의 방법을 용기를 내어 실행하여 보자.


(1) 용서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결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시간이 약이다’란 말을 종종 듣는다.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상처라 하더라도 시간이 가면 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용서는 시간이  흐른다고 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음주운전자로 인해서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분노와 비애 속에 살았던 한 자매의 말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러진 팔이 붙는 것과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부러진 팔이 아물기는 하지요. 하지만 뼈가 제멋대로 붙으면서 팔이 비뚤어지게 되죠. 나아가 팔이 너무 약해져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다시 부러지게 되지요. 바로 그거에요. 용서하지 않고 그냥 방치된 상처는 아물긴 아무는데 뒤틀려지고 나약한 내면세계를 만들 뿐이지요.” 


용서는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용서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결심을 내리는 그 순간이 바로 용서의 시작이다. 용서란 주제로 철학을 연구한 네블렛(William Neblett)과 같은 사람은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용서과정의 75%는 완성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시작이 반이 아니라 그 이상인 것이다.


필자는 대학 시절 인종이란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인종이는  신앙심이 깊고 착실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3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 인종이의  부모님은 열심한 신자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가해자 학생들의 부모들은 여러 차례 인종이 부모님을 찾아와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였다. 인종이 부모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학생들을 용서하기가   정말 어려웠지만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하였다. 그때 인종이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절대로 당신들의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보면 너무 괴롭습니다.” 인종이 어머니께서는 정말 하기 어려운 용서를 신앙의 행위로서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용서를 하고 나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 점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한 바로 그 주간 주일미사 중에 아들이 주님 품안에 안겨 있는 것을 환시로서 본 것이다. 이 체험이 있고나서 인종이 어머니는 비로소 가해자 학생들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또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 속에서도 그 아들이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니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빠삐용이란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스티브 맥귄이 연기한 실제 주인공은 불란서의 앙리 샤리에르이다. 1930년 당시 스므 살이었던 앙리는 파리 시내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앙리는 실적에 눈이 멀었던 검사에 의해서 무고하게 살인자로   체포되었다. 검사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앙리를 살인자로 유죄판결 내리는데 성공하였다. 앙리는 자기 인생을 망친 검사에게 복수하고자 무려 아홉 번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 14년이 지나서 탈출에 성공한다. 빠삐용 영화는 여기서 그 이야기가 끝난다. 지금부터는 그가 탈출한 이후 있었던 실제 이야기다. 


앙리는 탈출한 후 남미로 도망쳐 곳곳을 전전하면서 갖은 일을 다  하여 돈을 모았다. 프랑스 형법상 30년이 지나면 범죄시효가 만료되는데 그 30년이 되던 해 파리로 돌아간다. 그의 나이 70이 다 되어 갈 때다. 그는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그 검사와 거짓 증인들을 죽이기 위해서 돌아간다. 파리에서 그는 자기가  젊었을 때 다녔던 거리, 부모님과 함께 걸었던 거리, 친구들과 놀던 장소를 거닐면서 점차 마음을 바꾼다. 특별히 그가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고 체포당했던 그 거리에서 마음을 바꾼다. 그는 하느님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하느님, 제가 복수를  포기하고 용서한다면 그 대가로 다시는 저와  같은 비극적 사건이 생기지  않게 해 주소서.” 그러자 그의 존재 밑바닥에서 다음과 같은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겼다. 앙리 샤리에르. 너는 자유롭고 사랑 받는 네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에 있다. 너의 원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 그들은 과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너는 여기에 있다. 마치 기적처럼. 그리고 지금 네가 확인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일에 관계된 사람 중에 네가 가장 행복한 자인 것을.” 


인종이 어머님의 이야기와 앙리 샤리에르의 이야기는 용서에 과정에 서 결심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잘 보여준다. 


용기를 내서 용서를 결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용서하기로 결심하니 마음의 자유가 찾아오더군요.” 용서해야 우리는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용서해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강론대 설교 자리에서나 고백실에서 언급되던 용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들 중에 신학자로서는 스머즈(Lewis Smedes)가 첫 번째 사람이다. 그는 <용서의 신학>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서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60킬로짜리 배낭을 지고 높은 산을 오른 후 정상에다 그 배낭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쌀 한 가마니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정상까지 올라간 후 그 정상에다 그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용서할 때 우리가 자유롭게 풀어주는 노예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다음 시를 보라.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포로를 놓아주어라. 안 그러면 그는 죽을 것이다.”


포로를 놓아주라고요?

나는 주님께 물었다. “그럼 정의는 어디에 있는데요?”


“포로를 놓아주어라.” 다시 주님이 외치셨다.


포로를 놓아주라고요?  

나는 노력해보겠다고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다시금 주님이 외치셨다.

“포로를 놓아주어라.”

결국 나는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며 포로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포로는 바로 나였다.


- 루이스 스머즈



우리가 미움 원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가 움켜쥐고 있던 그 미움 그 원한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 누군가에게 집착하면서 미움과 원한을 움켜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착이 우리의 진을 얼마나 빼는지!


훌륭한 스승이 한 분 있었다. 제자가 그에게 고민을 털어 놓았다. “스승님, 인간이 인생의 고뇌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방법은 없습니까?” 스승은 제자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더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제자는 어리둥절했지만 스승의 뒤를 따라 갔다. 숲에 이르자 스승은 “내가 지금부터 너에게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말씀하시고는 커다란 나무에 온몸을 밀착시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놔 달란 말이야, 이놈의 나무야. 제발 나를 놓아줘!” 제자는 스승의 행동에 놀라 달려가 스승을 나무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스승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은 스승이란 점을 깨달았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나무가 스승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이 오히려 나무를 꽉 붙잡고 놓지 않으면서, 왜 나무가 놓아주지 않는다고 소리를 치시는 것입니까?”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에서 팔을 놓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길이란다. 실제로는 세상 고통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 고통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지. 인간의 모든 고뇌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의 많은 고통은 미련스런 집착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를 갈면서 “죽을 때까지 그 놈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란   말을 하고 실제로 그 말을 실천하면서 원한 속에 죽는다. 대단히 파괴적인 집착이다. 용서는 정의의 이슈가 아니다. 용서는 치유의 이슈다. 정의만으로는 내 안의 상처와 울분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가 파괴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용서하기로 결심할 때 비로소 치유의 과정은 시작된다. 



(2) 상처에서 일어날 수 있는 치유의 열쇠는 나 자신으로부터


상처 받은 사람이 쉽게 빠지는 것이 자기 연민이다. 자기 연민은 스스로 빠진 것이기에,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를 끄집어낼 수 없다. 자기 자신이 연민의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리는 상처에서 낫고 싶다고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상처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설명해본다. 우리 중에는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일같이 자기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동정을 받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편이 되어서 상처 준 사람을 비난해 줄 때 기뻐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자기와 함께 동조해주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을 비난한다. 이런 사람들은 상처에서 낫기를 원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상처가 사라지면 더 이상 그 상처를 준 상대방을 계속해서 미워하고 괴롭힐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상처에서 치유되느냐 안 되느냐의 열쇠를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서 찾으려 한다.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이 나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나의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 믿는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평생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상처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상처와 함께 불행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책임과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 


하느님은 훗날 천국에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을 것이다. 

“얘야. 너는 정말 그 몹쓸 사람을 만나서 고생을 진탕 했구나. 네가 그 사람으로 인해서 그렇게 막 반응하고 네 인생을 함부로 굴렸던 것은 다 그 사람 탓이다. 네 책임은 결코 아니다.” 


대신에 하느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얘야. 네가 참으로 몹쓸 사람 때문에 고생했구나. 그러나 네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했느냐 하는 것과, 또 그 사람 때문에 네 인생을 함부로 살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네가 책임질 사항이란다.”


결국 삶은 선택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우리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선택하여야 한다. 아무리 상처를 받고 고통스러워도 삶을 대하는 태도만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려는 신자답게 책임감, 분별된  사랑, 정직함, 온유함의 태도를 갖고서 선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넬슨 만델라는 27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서 미움과 원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결한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가 인간 정신의 향기를 그대로 보조할 수 있었던 내적동인은 무엇일까? 그는 다음 시를 늘 외우면서 그대로 믿었고 행동하였다. 


인빅터스

by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


온 세상이 지옥처럼 캄캄하게

나를 엄습하는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하느님께 감사하노라

내게 정복당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음을


삶의 잔인한 손아귀에서도

난 신음하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운명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내게 정복당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으니.



(3)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많은 경우 상처받은 사람은 자신을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내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 있도록 행동했을까? 상처받은 내가 바보지. 그런 내 자신을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자신에 대한 실망 때문에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다. 


특별히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부부지간에 상처가 있었을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상대방을 미워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단죄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에게서 상처를 받아 그토록 비참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사실은 자기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단죄하고 혐오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나 오빠 또는 친척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의 많은 경우 가해자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미워한다. 가해자가 좋지 않은 동기로 자기 몸에 손을 대었을 때, 거절하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며 죄책감에 떤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본시 더러운 피가 흘렀기에 그렇게 허락했다고  단죄하면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어린아이가 아무런 힘도 없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젊은 여성은 5살 때부터 7살 때까지 무척이나 좋아하며 따랐던 친오빠에게 여러 번에 걸쳐 성추행을 당하였다. 마침내 부모가 그 일을 발견하면서 더 이상 그런 불상사는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당시 일어났던 모든 불행이 다 자기 잘못으로 일어났다고 자책하고 있다. 자기가 오빠 앞에서 도발적인 춤을 춰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녀 나이 5살 때 과연  ‘도발적’이란 단어의 의미를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오빠를 강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자기 안에 세워서 오빠에게 면책권을 주었던 것이다. 사건의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기에 자신을 끔찍이 미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를 용서해야만 비로소 용서의 과정이 완성된다. 완전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다. 만약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의 과정은 완성되지 않는다.



■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들

  

(1) 첫 번째 오해 :  일단 용서하면 몸과 마음으로 다 상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용서에 대한 오해 중 가장 큰 것이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면 더 이상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롭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의지로서 용서한다는 것과 느낌 차원에서 용서한다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는 하나의 선택이요 결심이다. 


그런데 몸 자체가 상대를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무리 의지적으로 용서를 했어도 우리 마음은 여전히 아픈 느낌들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을 불시에 만나게 되면, 우리의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는 다시금 피를 흘린다. 


나아가 받은 상처가 아주 크고 깊다면 아무는 시간은 그만큼 더 걸릴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했을 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이용당했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명예 훼손을 당했을 때 . . . 등등의 이런 모든 상처들은 시간이 한참 걸려야만 아물 수 있는 큰 상처들이다. 


내가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로 결심했는데도,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계속 올라와서 몸서리 처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내 마음의 상태를 받아주는 것이다. 즉 내가 상대방으로 인해서 아직도 아파하고 있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마음의 상태를 받아준다는 것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만약에 내 마음의 상태를 받아주는 일이 안 된다면 또 한 번 자신을 죽이는 일이 된다. 곧 자신이 참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기비판과 비난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방 때문에 상처를 받아  피를 흘리고 있는 마당에 내 스스로 또 생채기를 더 내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다음 사실을 자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의지적 행위로서 용서를 결심 할 수 있지만 느낌과 몸으로서 까지 상대를 용서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2) 두 번째 오해 :  용서는 곧 화해라는 오해


많은 사람들이 용서와 화해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런데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했다고 꼭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상대와 관계없이 나를 위해서 나의 미래를 위해서 내가 하는 것이다. 나 혼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쌍방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려면, 상대가 진심으로 자기 행위를  뉘우치고, 나에게 용서를 청하고, 내가 그러한 상대를 진심으로 받아줄 수 있을 때나 가능하다. 화해는 양쪽이 다 진정으로 관계가 다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또 관계 재-설립을 위해서 성실한 노력을 하고자 할 때 가능하다.  


그리스도교는 용서를 강조하는 종교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용서뿐이다. 화해는 아니다.

복음서를 보면 딱 한 차례 주님께서 화해할 것을 요구하였다(마태 5,24). 하지만 이 경우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가 아니다. 내 편에서 형제에게 상처를 준 경우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내가 형제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지만, 만약 주었다면 마땅히 그에게 가 용서를 청하고 화해를 해야 할 것이다. 해당 성경 구절을 읽어보라.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3-24)  


다시 말하지만 주님께서는 원수를 용서하고 우리에게 명하셨지 원수랑 화해하라고 우리에게 명하시지 않았다. 


물론 용서를 넘어서서 화해까지 갈 수 있으면 참으로 좋다. 특별히 가족이나 친지 사이에서 또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에서 화해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다. 하지만 화해는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용서가 꼭 화해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성경 이야기 하나를 한다. 성조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갔을 때 형들에 대한 그의 원망과 원한은 대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어느 순간부터 형들을 완전히 용서하였다. 이 점은 그가 맏아들 므나쎄를 낳고 “하느님께서 나의 온갖 쓰라림과 아버지의 집 생각을 잊게 하셨다”(창세 41,51)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온갖 쓰라림과 아버지의 집 생각을 잊었다’란 말은 형들을 향한 부정적 감정이 더 이상 요셉 마음 안에 없다는 점을 알리는 말이다. 곧 용서했다는 말이다.  


우여곡절 속에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심한 기근이 7년간 계속 되면서 형들이 식량을 구입하고자 이집트에 왔다가 요셉 앞에 선 것이다. 형들은 요셉을 못 알아보았지만,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의 정체를 형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대신에 형들을 아주 거칠게 대하면서 그들이 변화되었는지를 시험한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도둑으로 몰고, 르우벤을 감옥에 가두면서 그들이 과거에 범했던 죄를 깊이 인식하고 진정으로 통회하는지를 시험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하고 잔인한 사람처럼 형들을 시험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형들과 화해하기 위해서다. 만약 형들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요셉은 형들과 화해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 나의 미래를 위해서 하는 것이요, 나의   원수와는 아무 관계없이 나 혼자서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실수하는 것이 있다. 굳이 상처 준 상대를 찾아가서 “나는 당신을 용서했습니다.”라고 말하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이다. 


'밀양'이란 영화는 여자주인공이 칸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았던   화제의 영화다. 이 영화의 주제는 용서다. 주인공 여자 신애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어린 아들과 함께 내려간다. 거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들이 유괴를 당해 살해당한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신애를 위로하던  이들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권고한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애는 교회에 나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며 통곡하는 가운데 모든 것에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신애를 교회로 인도한 사람들이 아들의 살인자를 용서해주는 것이 신자다운 모습이라고 집요하게 권고한다. 그녀는 결국 유괴범을 용서해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교도소로 가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유괴범이 죄책감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고, 자기를 보면 무릎을 꿇고 용서해 달라 빌 것이라고. 


그런데 그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유괴범은 아주 편안한 얼굴로 신애를 맞이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은 너무나 평안합니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신애의 머리꼭지는 돌아버린다. 그녀의 가슴은 아직도 썩어 뭉그러져 있는데 그녀의 아들을 죽인 자는 주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평화를 누리고 있다니. 면회 장소에서는 그저 벙 쪄서 아무 말도 못했던 신애는 밖으로 나오자 하늘을 향해 분노하며 절규한다. “나보다 누가 먼저 저 사람을 용서 한다 말입니까? 내가 아직 저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이에요? 내 아들을 죽인 저 사람의 죄를 나 밖에 누가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후 신애는 신앙을 비웃고 하느님에게 도전하는 행위들을 서슴치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 신애(그리고 용서를 권했던 교회 신자들)는 "용서라는 것은 가해자와 아무 관계없이 피해자 자신의 내면 안에서 홀로 이루어지는 고결한 작업이다"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결과 용서를 결심하기 전보다 더 큰 상처를 받게 된 것이다. 심리학자 엔라이트(Robert Enright)도 용서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다. 그가 말한다. “내가 용서해야 하는 상대방과 개인적인 접촉을 할 필요는 없다.”



(3) 세 번째 오해 :  용서했으면 다 잊어버려야 한다는 오해


정말 용서했다면 과거의 상처를 다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용서를 했다 해도 과거의 상처를 기억할 수 있다. 나아가 꼭 기억해야 할 경우도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가 공간적으로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가 똑같은 잘못을 나에게 다시 저지르지 않도록 또 다른 가족에게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하면서 상처 준 사건을 잊지 않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계단에서 내려오다 넘어진 사람이 계단을 내려올 때 조심하는 것은 또 다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만일 넘어졌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덤벙덤벙 내려온다면 또 다시 넘어져 다칠 것이다. 


불에 덴 사람이 불을 조심하는 것은 또 다시 불에 데지 않기 위해서이다. 만일 불에 데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불에다 손을 댄다면 또 다시 델 것이다. 과거 상처에 대한 기억은 같은 상처를 받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정신의학자 사스(Thomas Szasz)는 말한다. “고집 센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지 않으면서 그 상처의 체험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어 다시는 같은 상처를 받지 않도록 자신을 돌본다. 



■ 강의를 마치면

  

아래에 열거된 내용들은 용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공통적으로 강조된 내용들이다. 


  • 용서는 나의 의지가 들어간 결심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다. 
  • 용서란 상처로부터 발생한 울화 분노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 용서란 내면의 평화, 내면의 자유, 내면의 힘을 되찾는 것이다.  
  • 용서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만드는 것이다.  
  • 용서란 나의 책임 하에 있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용서란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목적이 있을 뿐 상처를 준 상대방과는 상관이 없다.  
  • 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우리는 용서하는 동시에 우리에게 상처준 상대방과 화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상대방과 헤어져서 나만의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 선택은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 용서는 있었던 일을 망각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다시는 같은 일로 상처 받는 일이 없도록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비꽃을 밟으면, 

제비꽃은 우리 발뒤꿈치에 좋은 향기를 남겨 준다. 

용서라고 말하는 것은 그 향기를 말하는 것이다


-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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